6편. 다 만들지 마라: 문제를 고르는 두 축
지난 편에서 근본 원인을 파고 내려갔더니,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였습니다. 신분증이 없는 사람, 신형 신분증이라 인식이 안 되는 사람, 촬영을 잘못하는 사람. 여기서 많은 팀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 문제네, 다 풀자.” 그리고 이 순간, 좋은 기획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번 편의 주제는 간단합니다. 다 만들지 마세요. 문제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문제에 손대지 않을지 고르는 것이 실력입니다. 이번 편은 그 선택의 기준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건 아니다
먼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심지어 진짜 문제인 게 확인됐어도, 손대지 않는 편이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쿠팡이 “비밀번호 없이 결제되니 불안해요”라는 의견을 반복해서 받는다고 합시다. 진짜 느끼는 불안입니다. 그런데 쿠팡의 핵심 가치가 “가장 빠른 결제”라면, 비밀번호 단계를 추가하는 건 자기 핵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이럴 때는 그 의견이 아무리 진짜여도 손대지 않는 게 맞습니다. 29CM가 “남성복도 있는지 몰랐어요”라는 목소리를 듣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핵심 고객이 여성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핵심 고객이 아니니 우선순위는 더 낮아집니다.
여기서 지난 편들이 다시 이어집니다. 2편에서 우리 고객을 정의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서 드러납니다. 문제의 크기를 잴 때 기준이 되는 건 “우리 고객”이지, 아무나가 아닙니다.
문제를 고르는 두 가지 질문
그럼 무엇을 기준으로 고를까요. 두 가지 질문으로 판단합니다.
-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인가. 즉 풀면 비즈니스에 큰 가치가 생기는가.
- 우리가 제품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인가. 즉 원인이 우리가 손댈 수 있는 안쪽에 있는가.
첫 번째는 “풀 만한 가치가 있나”를 묻고, 두 번째는 “풀 수 있나”를 묻습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질문입니다. 가치는 큰데 우리 힘으로 못 푸는 문제가 있고, 우리 힘으로 쉽게 풀 수 있지만 풀어봤자 별 가치가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질문일까요. 자원이 한정된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임팩트만 크고 못 푸는 문제에 매달리면 시간만 날립니다. 반대로 쉽게 풀 수 있어도 임팩트가 없으면 그것도 낭비입니다. 두 질문을 모두 통과해야, 지금 붙을 가치가 있는 문제가 됩니다.
두 축으로 좌표에 찍어 보기
이 두 질문을 두 개의 축으로 세우면, 모든 문제를 하나의 좌표 위에 찍을 수 있습니다.
- 가로축, 비즈니스 임팩트: 풀면 회사에 얼마나 큰 가치가 생기는가. 이걸 잴 때는 “매달 얼마가 새고 있는가”로 환산해 보면 좋습니다. 그러면 “중요해 보인다”는 감이 아니라 “매달 이만큼의 계좌 개설 기회를 잃고 있다”는 크기로 말할 수 있습니다.
- 세로축, 해결 가능성: 원인이 우리 제품 안에 있어서 우리가 손댈 수 있는가. 손댈 수 있어야 솔루션이 성립합니다. 원인이 바깥에 있으면, 아무리 중요해도 지금 우리 힘으로는 못 풉니다.
두 축을 교차시키면 네 칸이 나옵니다.
- 임팩트 크고 풀 수 있음: 지금 붙는다. (선정)
- 임팩트 작고 풀 수 있음: 급하지 않다. (후순위)
- 임팩트 크지만 지금 구조로는 못 풂: 구조를 바꿔야 풀린다. (장기 과제)
- 임팩트 작고 풀기도 어려움: 손대지 않는다. (기각)
이 네 칸이 주는 선물은, “다 하자”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겁니다. 문제를 좌표에 찍는 순간, 지금 붙을 것과 미룰 것과 버릴 것이 눈에 보이게 갈립니다.
관통 사례를 좌표에 얹어 보기
지난 편에서 찾은 세 갈래의 원인을 이 좌표에 얹어 보겠습니다.
- 신분증을 아예 안 가지고 있어서 귀찮아 그만두는 경우. 이탈의 30%가량으로 가장 큰 몫입니다. 규모는 크지만, 신분증이 없는 걸 우리 제품이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임팩트는 크지만 지금은 못 푸는 장기 과제로 둡니다. 모바일 신분증 같은 구조적 변화가 뒷받침돼야 풀립니다.
- 신형 신분증을 OCR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10%가량으로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하지만 원인이 우리 OCR 안에 있어서 우리가 손댈 수 있고, 개선하면 매달 상당한 수의 계좌 개설 기회가 새로 열립니다. 그래서 이걸 선정합니다.
- 사용자 본인이 촬영을 잘못하는 경우. 이 역시 10%가량인데, 제품이 직접 개입하기 어려운 영역이라 뒤로 미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판단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고른 건 이탈의 가장 큰 몫이 아닙니다. 가장 큰 몫은 신분증이 없는 경우였지만, 그건 지금 못 풉니다. 대신 규모는 좀 작아도 우리가 풀 수 있으면서 임팩트도 분명한 부분을 골랐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문제를 고른 겁니다.
이게 이 단계의 핵심입니다. “제일 커 보이는 것”이 아니라 “풀 수 있으면서 가치도 있는 것”을 고르는 것.
안 만드는 것도 실력이다
이 판단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한 문장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임팩트가 낮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획자는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사람도, 많이 만드는 사람도 아닙니다. 안 만들 것을 골라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팀의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고, 거기에 무엇을 태우고 무엇을 태우지 않을지 정하는 게 기획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다 만들려는 팀은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못 만듭니다.
다음 편 예고
풀 문제를 골랐으니, 이제 어떻게 풀지를 고민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성급해집니다. “저 서비스 그 기능 좋던데 우리도 넣자.” 다음 편에서는 왜 좋은 솔루션이 상상력이 아니라 분석력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다른 사례에서 배우되 무작정 베끼지 않는 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줄로 남깁니다. 다 만들지 마세요. 임팩트와 해결 가능성, 두 축으로 문제를 골라내는 것, 그리고 안 만들 것을 정하는 것이 기획자의 실력입니다.